얼마전 군함도를 보면서 일본의 극악무도함에 치를 많이 떨면서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다음주면 8.15 광복절입니다. 나라를 위해 후대를 위해 목숨바쳐 일본군과 싸우신 분들이 있었기에 광복을 하여 저희가 자주독립국가에서 자유를 보장받으며 살고 있지 않나 그런 마음에 이렇게 글을 써봅니다.
이번엔 알게 모르게 뒤에서 독립군을 돕고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했던 여성 독립운동가 6인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김구, 윤봉길 그리고 「이화림」
1930년 중국 상해. 25살의 한 아가씨가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화림. 14살에 3·1운동을 했고, 22살에 학생운동을 했던 이화림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상해로 왔답니다. 그리고 김구가 만든 한인애국단에 가입합니다. 이화림은 여기에서 윤봉길을 만납니다.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등을 죽인 인물입니다. 이화림은 이 암살 계획이 성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답니다. 윤봉길과 함께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 행사가 열리는 홍구 공원을 여러번 답사했고, 사건 당일에도 암살 현장에서 윤봉길을 끝까지 지켰봤습니다.
또 이화림은 1938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에서 부녀대 부대장을 맡았습니다. 조선의용대는 독립운동을 했던 무장부대입니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을 때 이화림은 전투에 참여하며 선전활동과 남성대원들의 식사 준비까지 도맡아 했습니다. 거칠고 숨 막히는 전투와 암살 현장에서 청춘을 보낸 이화림. 나라를 사랑했던 그녀의 삶을 우리 함께 기억하도록 합시다.
|총을 든 61세 여성 「남자현」
1919년 3·1운동 당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목격한 남자현은 무장항쟁에 뛰어들기로 결심합니다. 남자현은 중국으로 가 서로군정서라는 독립군 단체에 가입합니다. 그곳에서 독립군 뒷바라지를 하면서 아들을 무관학교로 보내 독립군으로 키우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자현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1926년, 조선 총독을 두번이나 지낸 사이토 마코토가 순종 황제의 장례식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겁니다. 남자현은 사이토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한국으로 오게됩니다. 그러나 남자현보다 먼저 사이토의 목숨을 노린 송학선이 사이토가 탄 자동차에 뛰어올라 칼을 휘둘렀습니다. 아쉽게도 그가 찌른건 사이토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경호가 강해지자 남자현 일행은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그로부터 7년 뒤, 남자현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자 일본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 육군대장이 중국 장춘에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당시 남자현의 나이 61세. 남자현은 "나는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는 나이가 되었다."며 암살을 결심합니다. 남자현은 권총과 폭탄을 몸에 숨기고 노부요시에게 가던 중 경찰에게 붙잡힙니다. 조선인 스파이가 경찰에게 정보를 흘린 겁니다. 경찰에게 붙잡혔을 당시 남자현은 의병 활동을 하다 전사한 남편의 피 묻은 옷을 껴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자현은 일본영사관 감옥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합니다. 고문을 당하다가 정신을 잃자 감옥에서 풀려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습니다. 남자현은 우리나라의 독립투쟁사에서 30년 동안 의열 투쟁을 벌인 유일한 여성이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을 바쳐 나라를 사랑했던 남자현을 우리 함께 기억하도록 합시다.
|엘리트 항일운동가 「김마리아」
2·8독립선언. 이것은 3·1운동에 불을 지핀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학생들은 뜻을 모아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주장하는 독립선언문을 썼고, 1918년 2월 8일, 다 함께 모여 독립선언문을 읽었습니다. 김마리아는 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당시 동경여자학원에 재학 중이던 김마리아는 여학생들을 모아 2·8독립선언문을 복사해 기모노띠 속에 감추고 부산으로 건너옵니다. 그리고 부산, 대구, 광주, 서울을 다니며 온 민족이 참여하는 독립운동을 하자고 부르짖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권유합니다. 3·1운동 당일에도 황해도 봉산, 신천 등을 다니며 여성들에게 3·1운동에 참여하라고 설득했습니다. 김마리아의 활약을 안 일본 경찰은 김마리아를 체포하고, 잔인하게 고문합니다. 하지만 김마리아는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답니다. 김마리아는 3·1운동에서 함께 뜻을 모았던 여성들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체의 회장을 맡아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이어갑니다. 애국부인회는 1919년 11월, 거금 6,000원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냅니다. 그러나 내부자가 일본 경찰에게 고발하는 바람에, 김마리아는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습니다. 이때에도 김마리아는 심한 고문을 받는 답니다.
김마리아는 일제 동경여자학원과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사회학 석사 학위까지 받았던 엘리트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쳤습니다. 결국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50세에 생을 마감한 김마리아의 치열했던 나라 사랑을 꼭 기억합시다.
|독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의 아내 「박자혜」
1919년 3월 1일, 조선총독부 병원. 3·1운동에 참가했던 조선인들의 일본 경찰의 총과 칼에 맞아 병원으로 실려 왔습니다. 조선인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큰 충격에 빠진 간호사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박자혜. 그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박자혜는 그날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박자혜는 조선총독부 병원에서 일하는 조선인 간호사들과 함께 간호사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만듭니다. 그리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인쇄물을 만들어 뿌리고, 만세운동을 하고, 조선인 의사들과 힘을 합해 진료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했습니다.
박자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박자혜의 남편 신채호입니다. 신채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언론인이었고,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 역사책을 쓴 사학자였으며, 안창호와 함께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를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박자혜는 신채호와 함께 국내외를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신채호가 감옥에 같혔을 때 계속 역사책을 쓸 수 있도록 필요한 자료를 보내 주었고, 두 아들을 누구의 도움 하나 받지 않고 키웠습니다. 7년 동안 신채호의 옥바라지를 하다 결국 신채호의 유골을 들고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박자혜. 박자혜는 독립을 우해 남편을 바치고, 자신을 바친 여성이었습니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어머니는 "당당히 죽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새하얀 수의를 손수 지어 보냅니다. 바로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랍니다. 가히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답지요? 조마리아는 안중근처럼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뒷바라지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조마리아의 집에서 먹고 자고 간호를 받았습니다. 조마리아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과 한 집에 살며 독립운동의 어머니 역할을 했습니다.
조마리아는 젊은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해 온 여성이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도록 돈을 빌려 주었는데 이 때문에 조선이 일제에 갚아야 할 돈은 1906년까지 무려 1,300만원에 달했습니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며 3,900억원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함께 돈을 모아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펼쳤습니다. 조마리아는 이때 은가락지 2쌍, 은노리개 2개, 은장도 1개 등 적지 않은 패물을 내놓았습니다. 국채보상운동 말고도 조마리아가 독립을 위해 자금을 모았던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대장 「윤희순」
16살 윤희순이 시집 온 강원도 춘천 유씨 집안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유난히 깊었습니다.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시아버지 유홍석은 의병대를 만들었고, 윤희순은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했습니다. 또 '안사람 의병가', '병정의 노래' 등 노래를 만들어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들을 훈련시키거나 모을 때 활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상황은 점점 나빠져만 갔습니다. 일제에 외굑권을 빼앗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가 고종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보다 못한 윤희순은 마을 여성들을 모아 여성 의병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름하여 안사람 의병대. 안사람 의병대 대원들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군사 훈련을 했습니다. 또 탄양제조소를 직접 운영하며 의병들에게 탄약을 공급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중국 만주로 간 윤희순은 민족 학교 노학당을 세웠습니다. 그러는 한편 중국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았습니다. 1913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죽고, 2년 뒤에 남편 유제원마저 세상을 떠났지만, 윤희순은 두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꿋꿋이 이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고문을 받아 죽은 아들을 먼저 보낸 뒤 <해주윤씨 일생록>을 쓰게 됩니다. 여기에 윤희순을 이런 말을 남깁니다. "매사를 시대에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가기 바란다."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옳은 도리는 무엇일까요?
출처 : 나는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상수리,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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